설교녹음에 문제가 생겨 설교문으로 대체합니다.

19.6.30 머리 둘 곳이 없으신 예수님 그리고 나 (눅9:51~62)

모태 신앙인 저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에 대해서 별로 고민이 없이 자랐습니다. 그냥 매 주일이 되면 당연히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학생, 청년 모임이 있으면 당연히 고민 없이 모임에 갔습니다. 리더가 좋으냐 나쁘냐 그런 것은 제게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낳고 자란 교회였기 때문에 그냥 당연히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시험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시험에 들일도 없었습니다. 교회는 나의 몸이었고, 나의 전부였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20살 때 성령체험을 하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냥 모태신앙이기 때문에 늘 교회를 나가야 하고, 습관적인 예배를 드려야 하는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의 문제도 아니라 제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고 쫓아가야 할 문제이지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생각해 보면 그때 저는 비로소 제자의 길을 들어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온 어떤 사람, 마태복음 8장에서는 그가 서기관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그런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 같습니다. 영적인 것에 눈이 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태요, 별 문제없이 다녔던 교회, 율법으로는 흠이 없을 정도의 삶, 그러나 자신의 생명력이 없는 종교적 생활을 보며 뭔가 불만족스러웠던 것입니다. 자신의 화려한 삶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한편 별로 화려하지도 않고, 자신이 보기는 밑바닥 생활처럼 보이고, 구차한 생활처럼 보이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그 안에 생명력이 있고, 기쁨이 있고, 뭔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이 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단을 하고 예수님을 찾았고, 한 번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배워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자신의 결단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이 좀 엉뚱했습니다.

, 아니오. 로 대답하지 않고 비유로 대신 대답을 먼저 하셨습니다.

 

그것이 58절 말씀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이전 상황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기 위해서 지름길인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른 길로 돌아가는 상황이었습니다.

,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한 뒤에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고 싶은 말씀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온실 속에서가 아니라 온실 밖에 나가서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20살이 되도록 온실 속에서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저는 그저 어머니 신앙생활하는 것만 보고 자랐습니다. 아무런 문제다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체험을 하고, 바로 그때 어머니가 쓰러지시고 병원에서 생사가 오고가고,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저의 신앙은 홀로서기를 해야 했습니다. 온실 속에서 온실 밖으로 나가야만 했습니다.

이제 진짜 예수를 믿는 것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이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격리되는 것입니다. 혼자가 되는 것입니다.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혼자가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두렵고 힘들겠습니까?

감옥에서 죄수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벌로 독방에 갇히는 것입니다.

제가 육군교도소에 근무할 때, 군 교도소에 두 가지 독방이 있었습니다.

보통 사형수들이나 무기징역수들이 들어가는 독방입니다. 여기는 괜찮습니다. 면회도 되고, 운동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규정을 지키지 않거나 해서 벌칙으로 가야하는 독방이 있었습니다. 이 독방은 오래 있지는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면회도 되지 않고 운동도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들어갈 만한 최소의 공간밖에 되지 않습니다. 교도소 안의 교도소입니다. 완전한 격리시설입니다.

 

오늘 58절 말씀은 이런 측면해서 이해를 해야 하는 구절입니다.

여우의 굴은 여우의 생활의 본거지입니다. 여우가 먹이를 찾아서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집이 없는 것 같지만 최소한도로 그를 지켜주고 그를 보호해줄 수 있는 굴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우가 최소한의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굴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하고, 폭풍우가 치면 그 폭풍우를 다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여우는 없습니다. 적어도 자기 몸을 숨기고 보호해 줄 수 있는 굴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베스티움 아파트가 건설 되면서 동네 길 고양이가 많이 없어졌습니다. 과거에는 빈집들이 많아서 그곳을 거처를 삼아 길 고양이들이 많았습니다. 그 때는 엄마 고양이가 앞서고 뒤에 새끼 고양이들이 줄줄이 쫓아가는 광경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머물 곳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택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잠을 자러 옵니다. 빈 화분 위가 그 고양이의 거처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고양이는 그래도 운이 좋은 고양입니다. 자기 머물 곳은 있기 때문입니다. 금요일에는 친구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훨씬 더 편해 보였습니다.

공중의 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며 먹이를 찾을 때는 저 새는 집이 없나 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그 새들도 돌아가는 둥지가 있습니다.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그냥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새는 없습니다. 나름대로 둥지를 다 만들어 놓고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을 보호해 줄 사회적 보호막, 누구도 예수님을 변호해주고 보호해줄 수 있는 주변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나를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58절의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을 누구에게 한 것입니까?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서기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유대사회에서 서기관은 어떤 위치에 있었습니까?

 

서기관들은 율법에 관하여서는 전문가였습니다. 율법(모세 5)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일이 그들의 주 업무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기들의 지식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전해 주었습니다.

AD 1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서기관(또는 율법학자)들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율법에 관하여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성경해석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신약 시대의 율법학자들을 성경에는 율법사라고 하기도 하였지만 보통 서기관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으로 대부분 바리새인들이었고, 지도자급이었던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의 우두머리들이었습니다.

서기관(율법학자)이 되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선생으로부터 개인적으로 지도를 받았으며 오랜 기간의 훈련과 학습과정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혹독한 훈련 과정을 마치고, 전승 사료와 그것을 해석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어 종교적인 규칙과 재판 법규에 정통하게 됨으로써 어려운 문제와 마주하였을 경우 그것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판단되었을 때 비로소보조 교사(Talimid Chakam)”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오랜 기간 동안의 훈련을 마치고 서기관(율법학자)이 되었을 때는 그의 나이가 보통 40세가량이 되곤 하였습니다.

서기관이 되면 그에게 종교상의 규약과 정결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위를 부여받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재판관의 일원으로써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며 랍비라고 불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해석하며 그에 따른 세칙을 만들 수 있었으며 이것을 가지고 일반 시민들의 종교 생활이나 일상생활 적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들을 지배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서기관은 유대 사회의 최고 엘리트 계층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맘껏 누릴 수 있었고,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유대 사회의 견고한 보호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비유를 든 것입니다.

여우도, 새들도 자기들의 굴과 둥지가 있다. 서기관인 너도 사회적 보호막이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것이 없어. 그래도 따를 수 있을까? 묻는 것입니다.

 

서기관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금까지 자기를 보호하고 있던 그 모든 사회적인 보호막을 다 걷어버리고 마치 굴을 떠난 여우 새끼처럼 아니면 둥지를 떠난 새 새끼처럼 예수님만 따라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길을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는 굴 없는 여우가 되는 것이며 둥지가 없는 새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감당하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욥 형제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나라에서 자기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 얼마든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배운 사람이고, 제법 부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그는 그의 보호막을 떠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이제부터 그는 머리 둘 곳이 없는 삶을 살기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욥 형제가 자신의 국가, 사회에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입니다. 생존의 문제입니다. 더 이상 그 어떤 누구도 그를 보호해 줄 수 없습니다. 국가도 사회도 그를 보호해 주지 않습니다. 굴을 떠난 여우요 둥지를 떠난 새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가 의지하고 있던 사회와 국가가 제공해 준 여러 해택이나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아무 것도 보장된 것이 없는 새로운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이번에 대장 내시경을 하고 의사로부터 조직검사를 해야 하고, 좀 더 일찍 오시지 그랬냐는 말을 듣고, 한 주간 동안 조직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습니다. 그거 하나는 참 감사했습니다. 내 믿음이 천국 믿음은 분명하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럼 내가 번영로교회 담임목사인데, 담임목사직은 계속 해 나가야 하는 걸까? 성도들을 제대로 섬길 수 있을까? 그냥 사직서를 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건강한 목사님이 오셔서 목회를 하셔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이 살게 하셨기에, 목회를 그만 둔다고 해도 삶에 대한 염려나 걱정은 들지 않았습니다.

또 한 가지는 나는 정말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는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부분은 주님 앞에 가서 책망 듣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 재물에 대해서는 욕심 부리지 않고, 주의 선한 일에 써야 한다는 것을 삶으로 배웠기 때문에, 지금까지 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모으거나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부분은 주님이 칭찬까지는 아니더라도 책망은 하시지 않겠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의 개인적인 영적인 삶을 보면 하나님 앞에 가서 책망을 들을 것만 같았습니다. 성경을 좀 더 많이 읽지 못한 것, 기도를 좀 더 많이 하지 못한 것, 책을 좀 더 많이 읽지 못한 것 등 이런 것들은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을 내렸던 것은 주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고 하면서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온실에 있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둥지, 굴을 떠나는 삶이다. 세상의 그 어떤 보호막을 의지하는 것을 떠나는 것이다. 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오늘 말씀을 보니 예수님이 서기관을 행해 말씀하셨던 것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날마다 광야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날마다 사막 한 가운데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누구도 경험해 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돈이라는 보호막, 학력이라는 보호막, 내가 조금이라도 의지하고 기대는 것을 벗어나서 광야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사막을 횡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 길을 걷기를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그래야 믿음으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의지할 것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의지하고 학벌이 있는 사람은 학벌을 의지합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믿습니다. 옆에 의지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아무 것 의지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은 고난을 함께 주시는 것입니다. 광야를 걷게 하고 사막을 건너게 하십니다. 폭풍우를 지나가게 하고, 시련을 겪게 합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겸손하게 되고, 이제는 내가 아니요, 주님이시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철저하게 망해야 내 안에 계신 주님이 흥하십니다. 세례요한이 그래서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는 나는 망하고 주님을 흥해야 한다고 하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조용히 순교함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어떤 분들은 학벌을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 이해가 됩니다. 학벌이 있으면 아무래도 사회에서 생활하기가 좀 더 쉽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제가 신학교 들어갈 때, 감리교신학대학은 전국의 신학대학 중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대학이었습니다. 당시 대학은 전기와 후기가 있었는데, 감리교 신학대학은 유일하게 전기 대학이었습니다. 1학년 때 군목 시험을 보았습니다. 앞으로 6년이나 7년 뒤에 군 장교 목사로 입대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30명의 군목 후보생을 뽑았습니다. 지금의 대입 시험과 같은 과목으로 시험을 보았습니다. 30명 중 19명이 저희 감리교 신학 대학교 저희 동기들이 합격했습니다. 나머지 11명은 장신대, 총신대, 서울신대, 대신대, 고신대, 성결교신대 등에서 나누어 뽑혔습니다. 그러니 나머지 신학대는 1~2명 합격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고만장하겠습니까? 젋었을 때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학벌, 실력으로 쓰시지 않는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김서택 목사님이 58절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맨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빈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관중석에서 구경하는 관중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라운드에서 뛰어야 하는 선수들입니다. 선수는 그의 몸을 가려줄 그늘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그는 뛰어야 할뿐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관중석에서 내려와서 그라운드에 뛰기 위하여 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믿는 것은 다된 밥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아무 것도 없는데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위대한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KBS 인간극장에 2012년과 2016년 의사이자 목사로서 필리핀에서 의료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박누가 선교사님의 이야기가 방영되었습니다. 그는 대학시절 단기선교를 떠났다가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서원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한 것을 잊어버리고 학생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중 성경 말씀을 통해 다시 하나님을 만났고 의료 선교사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의대를 졸업한 그는 신학을 공부하여 의료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필리핀 마닐라에 선교 병원을 세우고,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네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오지를 돌아다니며 예수님의 사랑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콜레라, 풍진 등 각종 질병을 앓고, 1992년 췌장암 초기로 수술을 받고, 2004년에는 위암말기 수술을 받았으며, 2009년에는 간경화에 당뇨 판정까지 받아 6개월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선교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 무엇으로도 잠재우지 못했습니다. 선교사님은 고통이 심할수록 더욱 하나님께 매달리며 정글 속 부족민들을 찾아가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었던 것입니다.

숱한 죽음의 위협 속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니 너무도 편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버리지 못해 주님의 형통함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나섰다면 아마 저는 한국에서 의사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르셨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8월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요한복음 1224절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던 주기철 목사님, 공산군에 의해 죽임당한 손양원 목사님, 김익두 목사님 등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오늘날 이 나라가 복음의 강국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 길, 인간적으로 보면 쉽지 않은 길이지만, 그러나 믿음으로 그 길을 걷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십니다. 오직 주님만 믿고 나아가면 주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그 길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고, 친히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